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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의 1번타자] 이용규의 모든것(이용규근황, 성장과정, 연봉)

by 이슈알려주는남자 2019. 9. 5.


안녕하세요 "이슈알려주는남자"입니다.


오늘은 "국가대표 테이블세터! 이용규선수의 연봉, 성장과정, 학창시절, 결혼 등 추가로 이번 이용규사태까지! 대한 모든것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럼 끝까지 봐주세요!



이용규선수의 어린시절


공수주 모든 부분에서 최정상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는 이용규 선수는 1985년 8월 26일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났습니다 . 야구를 하셨던 삼촌과 야구를 좋아했던 아버지 영향으로 어린시절 야구를 접했으며 야구가 너무나 좋았고 야구를 하고 싶었던 이용규선수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아버지의 지원아래 야구를 시작하게 됩니다 야구를 사랑한 만큼 그이상의 재능이 있었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 주전에 올라갈 만큼실력이 있었고 잠신중학교로 진학한 중학교 1학년 시절부터 팀의 주전으로 시작한 유망주 였습니다.


고등학생의 이용규



사실 이용규는 야구명문고인 휘문고등학교에 진학할 계획이였는데요 하지만 이용규선수는 1학년 선배였던 이호신선수가 휘문고등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을 펼치고 있었고 같은 왼손잡이 외야수라는점이 자신과 포지션이 겹치기 때문에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없을거라 판단했는데요 그래서 휘문고가 아닌 덕수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됩니다. 당시 덕수고는 이용규를 스카우트할 생각이 없었는데요 하지만 이용규선수의 강렬한 눈빛에 반한 감독은 이용규선수는 스카웃을 강행합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였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부터 팀의주전자리를 차지하며 1학년때 참가한 청룡기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타격왕에 오르며 자신의 재능을 전국에 떨쳤는데요 당시 같은학교의 최진행 4번타자와 좋은 콤비를 보여주었고 덕수고를 좋은성적에 올리며 많은 프로팀의 시선을 받았는데요 하지만 본인이 원했던 수도권팀의 1차지명을 받지 못하였고 당시 엘지와 두산관계자는 "힘이 없고 컨택능력만으로는 나무배트를 사용하는 프로에서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지으며 1차지명을 받지 못하게되는데요


이때 이용규선수도 속상했지만 외소한체구를 물려줬다고 느끼신 아버지께서 미안함에 이용규 선수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고하네요.... (이 인터뷰를 보면서 눈물이 찡..하더라구요) 이후 아버지는 대학에 진학해서 나무배트로도 충분히 잘 할 수 있다는것을 입증하자며 대학입학을 권유했지만 바로 프로대뷔를 꿈꿨던 이용규선수는 신인드래프트에 나오며 2차지명 전체 2순위로 원했던 LG트윈스로 시작하게 됩니다


LG에서의 험난했던 프로의 시작


그렇게 이용규선수는 본인이 원했던 LG에서 프로를 시작하게됩니다 하지만 그당시 LG에는 이병규 박용택 등의 최고의 프렌차이즈스타가 외야에 즐비했으며 당시 백업의 대도의 이대형선수까지 결국 치열한 경쟁속에 선발로 출전기회는 없었으며 빠른발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주자 또는 대타로만 기용되며 타격에서는 0.125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빛을 못보는 시기였습니다.


인생의 전환점 KIA와의 트레이드


이용규선수에게도 기회가 찾아오게 된계기는 홍현우 선수의 트레이드입니다 홍현우선수가 다시기아로 복귀하면서 신인 외야수중 한명을 내주어야했고 LG는 이대형선수와 vs 이용규선수를 저울질하게 되었고 그중 더 가능성이 있다고 느낀 이대형 선수를 잔류시키고 이용규선수를 같이 기아로 보내게 되는데요 이때부터 탈쥐효과(엘지에서 트레이드로 나오면 대박난다...)라는말이 나오게되죠


 당시 기아는 외야자원이 많이 부족했고 외야자원을 키워야했던 기아는 이용규선수를 선발로 기용하기 시작했고 빠른발과 좋은 수비력! 컨택능력까지 갖춘 이용규선수는 9번타자로 시작해 팀의 테이블세터진이 되었고 2006년 시즌 공수주를 겸비한 최고의 외야수로 발전하게 됩니다.

시즌타율 0.318(3위), 안타 154개(1위), 득점 78(2위) 타점39 도루38개(3위)로 첫 외야구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으며 처음으로 성인무대 국가대표까지 뽑히게 됩니다.



국가대표 테이블세터가 된 이용규



2007년 시즌은 슬럼프로 주춤하였으나 곧바로 2008년 다시 3할타율에 올라왔고 베이징올림픽에 참가하였으며 첫국제대회 금메달을 차지하며 WBC준우승 등을 이끄는등 대한민국 최고의 테이블세터중 한명으로 자리잡게 되며 이후 2010년도 광저우 아시아게임에서도 금메달까지 목에걸며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었는데요


그당시의 컨택능력은 감히 역대 최고라고 불릴수 있을만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용큐놀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한타석에서 20구까지 투를 던지게 하는 등 1번타자로 출전해 많은공을 보고 투수에게 많은 공을 던지게하며 2011년도 시즌 타석당 투구수는 4.3개, 헛스윙비율은 1.7% 말도안되는 기록을 새우게 됩니다 그당시 이용규선수가 타석에서 끈질김은 정말 보는 내내 눈을 즐겁게 할 정도였으니까요


FA가 된 이용규 한화로의 이적


2013시즌 FA권리를 얻게 된 이용규 선수는 많은 기아팬들이 기아에서 꼭 잡아주었으면 했지만 기아프런트와 조율이 잘되지 않았고... 당시 FA시장이 너무나 과열된 상태였으며 당시 큰손이였던 한화가 이용규선수에게 4년에 67억을 안겨주며 한화로 이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용규선수하면 항상 따라오는말이 "부상"인데요.. 온전하게 풀타임을 뛴시즌이 거의 없을정도로 내구성이 약하다 라는 평을 받아왔는데요 2014년시즌 계약 첫해부터 부상을 당하며 FA먹튀가 아니냐라는 말이 나왔으나 2015년 시즌 한화의 1번타자로 출전하기 시작하여 타율0.341 안타 168개 타점42개, 득점94개 도루29개를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2016시즌에서도 타율 0.352 출루율 0.438등 좋은모습을 보이기도했지만 역시나 달고다니던 크고 작은 부상이 있었는데요 2017년시즌 또한 부상으로 최악의 시즌을 맞이했고 FA권리를 재차 행사 할 수 있었으나 "올시즌 내가 보여야 할 모습을 다 못보여드렸다 FA권리를 행사하는건 스스로 납득하지 못한다"라며 FA권리를 포기하였고 2018년시즌 134경기에 출전해 0.293를 보여주며 아직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며 다시 FA를 신청하게 됩니다.


이용규 트레이드 사건 총정리


이용규선수는 2+1년에 26억원에 다시한번 FA를 계약하게 되어 한화에서의 선수생활을 연장하였으나 한용덕감독은 이용규선수에게 중견수가 아닌 좌익수로 포지션 변경을 요구했고 1번타자가 아닌 9번타자로 출전하기를 요구하였고 이를 받아드릴 수 없었던 이용규 선수는 다른팀과 트레이드를 해달라 구단에 요청하게됩니다


이에 팀기강을 무너트렸다는 이용규선수에게 무기한 출전정지라는 무거운 중징계를 내리게되는데요 최근 이러한 징계가 풀렸지만 1년동안 경기에 나올 수 없었던것이 본인스스로에게도 큰 마이너스 요소가 되었으며 팀에서도 외야수 부재로 많이 힘든 한해가 되고있습니다.


사실 세대교체가 필요한팀이긴 맞으나 너무 자신의 자존심만 생각했던 이용규선수도 아쉽고..너무 한화를 대표하는 테이블세터가된 이용규선수에게 그러한 처분을 내린 한화도 개인적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용규선수 FA금액



이용규선수는 2013년 4년 67억원 기아>한화


                  2018년 2+1 26억원 한화 잔류


마지막으로 이용규선수의 FA금액을 보여 이상으로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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