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BO 결과, 순위, 이슈/KBO선수의 모든것

양준혁의 모든것[연봉, 통산성적, 성장과정 등]

by 이슈알려주는남자 2019. 9. 24.

 안녕하세요. "이슈알려주는남자"입니다.

 

오늘은 배트를 거꾸로 들어도 3할을 친다는 푸른피의 사나이 양준혁선수의 연봉, 통산성적 성장과정 등 모든것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럼 끝까지 봐주세요~

 

 

1.  양준혁의 학창시절

 

양준혁선수는 1969년 7월 10일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사촌형이었던 양일환 선수와 삼촌을 응원하기 위해 야구장에 자주 드나들었고 자연스레 야구의 매력에 푹 빠져든 양준혁선수는 초등학교 3학년시절 부모님에게 야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야구를 시켜달라고 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양준혁선수의 집안은 넉넉한편이 아니라 쉽게 허락할 수 없었으며 그래도 계속되는 요구에 그럼 재능이 있는지 친척중 가장 야구를 먼저 시작한 한장철씨에게 테스트를 하게했고 결과는 "100%품질보증" 완전한 재능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며 1년 뒤인 초등학교 4학년시절 부터 신생팀이었던 남도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하게 됩니다.

 

왼손잡이에 빠른공을 던진 양준혁선수는 투수, 타자 모두 뛰어났으며 투수쪽에서는 더욱 특출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요 초등학교 6학년시절 전국대회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였고 타격에서는 타율 0.583을 기록하며 신생팀이었던 남도초등학교를 전국대회 3위까지 끌어오르며 남다른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2. 혹사...어린나이의 부상

 

경운중학교로 진학하여 1학년부터 에이스로 활약한 양준혁선수에게 시련이 찾아오게 됩니다. 당시 어린선수를 보호하는 그런방법을 잘몰랐으며 어린시절부터 혹사를 당해 팔꿈치상태가 너무나 안좋았고 가장 잘 관리되어야 할 성장기에 팔꿈치를 다쳐 중학교 3학년시절부터는 더이상 공을 던질 수 없을 지경까지 오게됩니다 이시절을 회상한 아버지는 "눈앞에 성적에 집착해 투수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 중고교야구 풍토의 희생자였다"라며 눈물을 흘리셨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심장병까지 앓게되며 야구를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고 병원에서도 낳을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아버지는 전국을 수소문 끝에 용하다는 한의원을 알아냈고 한약을 먹고 기적적으로 완치되었다고 합니다.

 

3. 양신 타자로 전향하다

팔꿈치로 더이상은 투수를할 수 없는여건에 투수를 포기하고 타자로 전향하였고 많은 명문고에서는 양준혁선수를 투수로 원했었고 대구상고에서 타자로만 출전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당시 명문고가 아닌 대구상고로 진학하게 됩니다. 이후 꾸준한 활약으로 고교에서도 3할이상을 쳐내며 좋은기량을 보여주며 전국대회에서 좋은성적을 거두진 못하였지만 자신의 기량을 전국에 알리게 됩니다.

 

영남대학교로 진학한 양준혁선수는 1학년 시절부터 팀의 4번타자를 맡으며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였고 대학선수권대회에서는 타율 0.545를 기록하며 타격상 3회 도루왕이라는 타이틀까지 호타준족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92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쌍방울의 2차 지명을 받게되지만 상무(군대)로 가며 군문제부터 해결하였으며 원래 마른체격의 양준혁선수는 상무에서 꾸준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상무소속으로 뛴 대회에서  홈런왕을 차지하며 프로로 가기위한 예열을 가하게 됩니다.

 

4. 양신의 탄생 

 

상무에서 군문제를 해결 후 삼성의 1차지명을 받은 양준혁은 데뷔시즌부터 이종범선수와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데요 결과는 데뷔시즌 타율 0.341(1위) 홈런 23개(2위), 타점 90점(2위) 득점 82개(2위) 장타율 0.598(1위) 출루율 0.436(1위)를 기록하며 라이벌이었던 이종범선수를 재치고 신인왕을 차지하게 됩니다 당시 신인왕뿐만아니라 같은팀의 에이스였던 김성래 선수와 MVP를 경쟁할 정도로 괴물의 탄생을 알렸고 이후 6년동안 뛴 삼성에서는 타격1위 3회, 안타1위 2회, 타점1위 1회, 장타율 1위 2회, 출루율 1위 2회 그야말로 전 부분에서 정상급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5. 원하지 않았던 해태와의 트레이드

당시 삼성에서는 강한 마무리투수를 원했고 해태에서는 거포의 좌완타자가 필요하여 임창용선수와 양준혁선수의 1:1트레이드가 강행됩니다 삼성을 너무나 사랑하였던 양준혁선수는 이를 거부하며 열흘간 잠수를 타는등 트레이드를 강하게 거부했지만 김응룡감독의 설득 끝에 해태에서 뛰게 되었고 역시나 뛰어난 기량을 유지하며 좋은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년을 마친후 다시한번 LG로 이적하였고 LG에서 뛴 2년의 시즌동안도 여전한 기량을 뽐내며 KBO최고의 타자로 활약을 펼친 양준혁선수는 FA의 자격을 얻게 되었고 당시 거액(4년 27억)을 받고 삼성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6. 삼성의 영원한전설 "양신"

 

삼성을 사랑했던 양준혁선수는 삼성에서의 러브콜을 당연히 수락하였고 다시 삼성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FA 1년차에는 예전같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하였지만 (첫3할 실패)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했으나 이시즌 한국시리즈를 우승하며 처음으로 챔피언반지를 얻으며 야구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나는순간이 2002년 "한국시리즈우승"이라 말할 만큼 첫 우승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게 됩니다.

 

7. 그의 트레이드마크 "만세타법"

2003년시즌 양준혁선수는 우리가 잘아는 만세타법으로 바꾸게 되는데요 이는 양쪽팔에 물혹이 생겨 제거수술이 꼭필요하였고 당시 적은나이가 아니였던 양준혁선수는 수술을하게되면 은퇴절차를 밟을꺼 같다는 생각에 시술로 치료를 하고 양쪽팔을 휘둘리기 힘들어 스윙한 수간 "한손을 놓으며 만세"를 부르는 만세타법으로 타격폼을 수정하게 됩니다. 타격폼을 바꾼 양준혁 선수는 이시즌 타율 0.329를 기록하며 건재함을 알렸고 2005년 2006년 통합 2연패를 기록하며 본인의 통산 3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내야 땅볼을 치더라도 항상 1루까지 전력질주를 하였던 양준혁선수는 이후 팀에서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었고 삼성을 강한팀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어주었습니다.

 

8. 18시즌으로 은퇴선언

 

양신이라고 불리며 통산 최다 타석, 통산 타자WAR 1위, 통산 최다 볼넷 등 기록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양준혁은 프로야구 18년을 뛰고 은퇴합니다. 항상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던 양준혁선수...항상 그를 응원하며 기억할 것입니다.... 그럼 지금까지 "이슈알려주는남자"였습니다.

 

 

 

댓글